뤼스, @shallwe_yolo
우중충한 잿빛 아래로 하얀 눈꽃이 날리는 날이었다.
잿빛으로 점철된 시야에서 예황부의 문 앞만 햇빛이 비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아직 젖내가 가시지 않은 뺨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눈 밭 위의 상아색 발이 곱아들었다. 눈을 고스란히 밟고 선 맨발은 붉다 못해 슬그머니 보랏빛을 띄었다. 엄동설한에 홑겹 옷만을 입고, 신발조차 신지 않은 어린 아이. 열 다섯쯤 되었을 까 싶은 아이는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 시기에 버려지는 아이들이야 드문 일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농사는 흉작이었고, 입을 하나라도 줄이려는 일들이 암암리에 일어났다. 성현제의 관심을 끄는 것은 버려진 아이의 존재가 아니었다.
아이는 마르긴 했으나 배를 곪지는 않은 듯 했다. 묵직한 광택이 도는 까만 비단 옷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고급스러워 보이는 종류였다. 봄에 어울릴법한 분홍빛 매화가 수놓인 소매 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시각각 푸르죽죽하게 변해가는 발은 실 터럭하나 걸치지 않은 맨살이었으나, 드러난 발톱은 누군가 정성들여 정리한 듯 단정하고 가지런하게 깎여 있었다. 무엇보다 추위에 떨면서도 제 앞에 선 성현제를 쳐다보는 눈빛이 이질적이었다. 눈송이가 내려않은 새초롬한 까만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눈이 저와 눈을 마주쳤다.
"뭘 봐요?"
"...이건 뜻밖의 전개로군."
인정한다. 성현제는 눈 앞의 아이에게 가졌던 호기심이 흥미로 변했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발가락을 꼼지락대면서도 문 벽에 등을 붙이지는 않는다. 귀하게 자란 것이 분명한 이 꼬마는 어디서 나타나서 남의 집 담벼락 아래에 자리 잡았을까. 성현제는 천천히 아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이의 어깨 위에 수북히 쌓인 눈더미를 부드럽게 쓸어 털어내며 그는 아이에게 웃어 보였다. 그를 아는 사람이 본다면 기겁할만한 일이었지만, 기묘하게 늦은 오후임에도 지나가는 행인이나 하인들이 없었다.
“남의 집 앞에서 이러고 있는 이유가 뭐지?”
“지나가던 중이었는데요. 여기 서 있으면 안됩니까?”
“안 될건 없지만, 자네 같은 어린 아이가 맨발로 돌아다니면, 신경쓰게 되는게 어른으로서의 도리지.”
“어린 아이?”
아이는 선이 가는 눈썹을 한차례 꿈틀거렸다. 이내 피식 웃으며 알만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 모습이 열 다섯의 외형과 어울리지 않는 원숙함이 묻어나와 성현제는 눈가를 씰룩였다. 아무래도 뜻밖의 손님이 저를 좀더 재미있게 해 줄 것 같았다. 이 안에 들어있는게 무엇일지, 까만 머리카락이 한차례 눈바람에 흩날렸다. 아이는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여전히 성현제를 올려다봤다.
“집이 없다면 재워줄 수는 있다만.”
“가던 길이나 가시죠.”
“안타깝게도 집으로 들어가는 길을 자네가 막고 있어서.”
“당신 집이라고요?”
말도 안돼. 같은 작은 혼잣말을 성현제는 놓치지 않았다. 어쩐지 전보다 더욱 불손해진 눈빛이 ‘거짓말’이라는 경악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울리지 않는 원숙함에 비해 감정을 숨기는 건 서툰 모양이다. 성현제는 웃으며 눈 앞의 이상한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천천히 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리는 맨발에 비단옷을 입은 소년. 기묘한 저릿함을 만끽하며 색소 옅은 눈이 휘어졌다. 역시 거짓말이지 이거, 같은 생각을 하고있을 것만 같은 아이의 배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꼬르륵, 하고 금방 꺼진 소리를 기민한 감각은 쉬이 알아차렸다.
“잠자리 뿐만 아니라 밥도 내어줄 수 있다네.”
“...어떻게 안거야. 정말 인간 맞아요?”
“안타깝게도 평범한 인간이네만.”
안내하시죠 집주인씨, 라고 말하며 아이가 앞장섰다. 저보다 먼저 눈이 쌓이지 않은 문 턱에 서서 무얼 하느냐는 듯 물끄러미 쳐다본다. 재워주겠다는 말을 거절한 아이는 밥 이야기가 나오자 퍽 달라진 눈빛을 했다. 그 간극이 무척 재미있어 성현제는 간만에 실로 유쾌한 웃음을 내보내며 기꺼이 제 집의 문을 열어주었다. 열린 문 너머로 수도에서 왕궁 다음으로 가장 넓다는 그의 저택이 여실히 드러났다.
정교하게 다듬은 돌이 깔린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면 옆에 운치있게 조성된 연못이 있었다. 한겨울에도 비단 잉어가 꼬리를 찰랑대며 뛰노는 이상한 풍경이었지만, 이 집에서라면 무엇이든 이상한 바가 없었다. 연못 옆의 조그만 정자를 지나 두 갈래로 갈라진 길에서 왼쪽으로 꺾는다. 닫혀 있던 장지문 앞에서 바지런히 바닥을 쓸던 하인이 허리를 조아렸다. 예정보다 이른 귀가였다. 성현제는 하인에게 귀한 손님이 왔으니 화로에 숯을 채우고 먹을 것을 내어오라 일렀다. 고개를 꾸벅 숙인 하인이 지나가며 흑색 아이의 맨발을 곁눈질 했다. 분홍빛이 사라진 발 언저리가 시릴법도 한데 아이는 여전히 발을 구르지도 않고, 눈이 아직 정돈되지 않은 돌 바닥 위를 디디고 있었다.
“집 한번 더럽게 크네요.”
아이의 감상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성현제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손수 장지문을 열어 아이를 안으로 모셨다. 나무 바닥에 가시가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게. 건물 안으로 아이가 발을 디뎠다. 간헐적으로 삐거덕거리는 복도를 지나 안방으로 들어가자 주인이 없는 동안에도 따끈하게 데워져 있던 바닥이 아이의 발을 맞이했다. 그 따뜻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는 그의 방 안을 구경한다는 명목으로 종전과는 다르게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몇천냥은 가뿐히 호가할 청자를 손으로 쓸어본다거나, 가지런히 깔려 있던 이불에 발을 슬쩍 넣었다 빼는 등의 맹랑한 짓이었다. 이불 밖으로 빼낸 발은 언제 푸른색을 띄었냐는 듯 금새 말갛게 달아오른 분홍빛으로 변해 있었다.
“동상이라도 걸리지 않았나 걱정이군.”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발을 슬쩍 들어 발가락을 보여주자 성현제는 다행한 일이라며 부드럽게 웃었다. 짧은 시간동안 음식 준비를 마쳤는지, 바깥에서 하인이 아뢰는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 이르자 장지문이 열리고 상을 날랐다. 식사를 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던 터라 하인들이 내어온 것은 간단한 다과 상이었다. 꿀에 절여 만든 절편과, 달달한 팥소가 가득 든 떡, 윤기가 반지르르한 약과 같은 것들이 앞에 놓였다. 성현제는 평소 단 것을 즐기지 않았으니 이 상차림이 누구를 위해 준비된 것인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귀한 손님이라는 말에 지레짐작으로 아이가 좋아할 법한 것들을 내어 온 것이다. 꽤 나쁘지 않은 처사였다.
“밥을 준다면서 이건 밥이 아니잖아요.”
“과자는 싫어하나?”
“단걸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건 맛있네요.”
웬걸, 이 흑색의 아이는 입으로는 툴툴거리면서도 약과 하나를 집어 먹고 나서는 절로 손을 뻗어 나머지 간식들도 입으로 가져갔다. 양 볼이 살짝 튀어나오도록 떡과 약과를 넣고 열심히 씹는 모습이 꼭 겨울잠을 자는 다람쥐 같았다.
“그래서, 먹었으면 밥값을 했으면 하는데.”
“돈 없어요. 먼저 주겠다고 해놓고 뜯어내려는거면 지금이라도 나가드리죠.”
“지나가던 아이에게서 돈을 뜯어낼 만큼 사정이 궁하지는 않네. 본인이 궁금한 건 자네의 이름이야.”
“...세이키. 라고 해 두죠.”
“본명은 아니라는 건가. 제법 비싼 이름이군.”
“이런 음식을 열 번쯤 가져온다면 모를까, 그 전에는 어림도 없어요.”
어차피 이제는 그리 의미가 있는 이름도 아니었다. 자신을 세이키라 밝힌 아이는 달달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더니 기어이 침상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꼼지락대며 이불 안으로 들어가 뒤집어 쓰고 하품을 했다. 아이는 그대로 꾸벅 졸다가 새근대며 잠에 빠져들었다. 성현제는 자꾸만 입가에서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느라 애썼다. 어디서 이런게 튀어나왔을까. 타인에게 무심하고, 모든 것이 지루했던 남자는 당당히 제 이불을 꿰차고 잠든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본명조차 밝히지 않은 당돌한 아이가 무슨 연고로 한겨울에 맨발로 제 집 앞을 선택했는지, 이불 사이로 흘러나온 소매 자락의 매화꽃이 하늘하늘 흩날렸다.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화로의 공기를 타고 매화 꽃 향기가 온 방안에 퍼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예황부의 아침은 언제나 분주한 편이었으나,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조용했다. 기침할 시간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은 까닭에 전 주인부터 집안을 모셨던 늙은 하인이 장지문을 두드렸다. 아직 손님이 기침하지 않았으니 추후에 다시 들어오라는 말에 하인은 의심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푹신한 솜이불 위에 닿은 뺨이 뜨끈뜨끈해서 세이키는 눈을 떴다. 천천히 눈을 손으로 비벼가며 열심히 눈곱을 덜어내고, 흐릿하게 보이던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냈다. 풀어 헤친 앞섶을 자랑하며, 성현제가 부드럽게 휘는 눈웃음을 지으며 세이키를 열렬히 쳐다보고 있었다.
“댁이 왜 여기 있어요?”
“아직 내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것 같아서. 성현제라고 하네.”
“아니... 성 모씨고 뭐고, 당신이 왜 나랑 같은 이불을 덮고 있냐구요.”
“그거야 여기가 내 집이고, 내 방 안의 내 이불이니까?”
논리적으로 흠 잡을 곳 없는 대답이었기에, 세이키는 잠시 벙어리가 되었다. 집 좋다고 자랑하는 거냐며 툴툴거리는 입을 가볍게 손으로 눌러주고서 성현제는 몸을 일으켰다. 안그래도 벌어져있던 앞섶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모습을 보며 세이키는 괜스레 시선을 돌렸다.
“집을 안내해 주겠네. 당분간 자네가 지낼 곳이니.”
“지나가는 길에 밥만 먹여주는거 아니었어요?”
“흠. 이름을 듣기까지 아직 아홉 번은 남았지 않나. 꽉 채울 생각이다만.”
세이키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으나 그 이상 불만을 말하지는 않았다. 집을 안내해주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성현제는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곧 하인이 기침할 때 가져다놓은 작은 옷을 한유진에게 입으라며 내밀었다. 한사코 거부하는 한유진에게 손이 많이 가는 공주님이라며 직접 갈이입혀 주려 하자 그제서야 옷을 받아들었다. 검은 옷을 벗고서 준비한 옷을 갈아입은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떻게 입혀놓든 제법 고풍스러운 태가 나는 것이 정말 귀한 집에서 자란 도련님 같은 모습이었다. 천천히 하나씩 알아갈 생각을 하며 성현제는 하인을 일러 아침상을 들이게 했다.
“고기를 먹지 않는군.”
“... 안 좋아해서요.”
“어제도 안 좋아한다는 것 치곤 잘 먹더니. 편식은 좋지 않으니 골고루 먹게.”
“정정합니다. 몸에서 안 받아요.”
“그렇다면야.”
은밀한 그의 취향을 알게 되어 기쁘다며 의미 모를 말장난을 건네는 성현제의 팔뚝을 찰싹 소리나게 때렸다. 아플법도 하건만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성현제는 상 위의 고기 반찬을 제 앞으로 거둬가고 세이키의 앞으로 다른 반찬들을 밀어 주었다.
세이키는 매일같이 성현제가 내어주는 밥을 먹고, 그의 방에서 잤다. 방 안에서 놀다가 질릴 때면 밖에 나와 산책도 하며 한가로운 날들을 보냈다. 연못에 가서 잉어들을 감상하며 밥을 주기도 하고, 정자에 앉아 하인들이 가져다주는 간식거리를 먹으며 소일거리를 했다. 그럼에도 집 밖으로는 일절 나가지 않았다. 성현제가 없는 동안 그저 대궐같이 넓은 온 집안을 뽈뽈거리며 돌아다녔다. 하인들이 지내는 방과, 쓰지 않는 낡은 창고와 같은 곳들을 돌아다니며 발도장을 찍었다. 그렇게 하루종일 돌아다니다 지친 몸을 비단 보료에 뉘일 때 쯤이면, 성현제가 돌아와 오늘은 어떻겠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별 다를 것 없었노라며 이리저리 이야기하다, 밥상이 올라왔다. 고기 반찬만을 골라 덜어내는 세이키 덕에 성현제의 앞에 그것들이 가득 쌓였다. 성현제는 군말없이 나물이며, 식후 입가심으로 올라온 단과자들을 세이키의 앞에 밀어 주었다. 양 볼이 터질 것 같이 단과자를 우물거리다 한유진이 먼저 잠들고, 뒤이어 성현제가 같은 침상에 몸을 누이는 것으로 하루가 마무리 되었다. 그렇게 지낸지 어언 한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열 번의 밥으로 약속했던 이름은 한글자도 꺼내질 기미를 보내지 않았으나, 성현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그 사실을 상기하고서도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뭐가 말인가?”
한유진은 입을 오물거리며 열심히 입 안의 음식을 씹어 삼켰다. 젓가락으로 다른 반찬을 가져다 대어주자 그것도 낼름 받아 삼키는 모습이 정말 다람쥐같다고 생각하며 성현제는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상 위의 마지막 음식을 치우고 나서, 물로 입을 축인 한유진이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에요? 지나가던 과객한테.”
“아직도 지나가던 참이라고 말할 셈인가?”
“사람 말을 못 믿으시네. 나 살찌워서 잡아먹으려는건 당신 아니고요?”
“잡아먹는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군. 나는 자네가 먹혀 줄 때 까지 기다리는 중이네만.”
“우와, 부정은 안 하시네. 완전 도둑놈 심보인데요.”
“그래서, 언제쯤 자네를 내어 줄 생각인지?”
한유진은 성현제의 말에 짖궂게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직, 아직은요. 그의 말처럼 저를 내어주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확인은 있되, 결심은 서지 않는 불온한 나날이 평안하게 이어졌다. 흔들리는 마음을 눈치챘는지 여태껏 잠잠히 있던 영혼 하나가 세이키의 안에서 으르렁대며 이빨을 드러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려는 불길을 잠재우려 세이키는 제 동생의 이름을 되뇌었다.
괜찮아, 유현아.
성현제는 저를 해치지 않는다. 세이키라는 이름 모를 존재가 이렇게 흥미로운 존재인 이상에는. 때때로 색소가 옅은 눈에서 엿보이는 무료함과 지루함. 그 사이에 비집고 들어온 저라는 존재가 성현제에게 강렬한 자극이 되었다는 걸 세이키는 알았다. 확신을 가지고 달래는 말에 요마는 천천히 기세를 사그라뜨렸다.
겨울 내내 성현제를 견제하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도 내리지 않는 겨울의 끝이었느나, 날씨는 여전히 추웠고, 바람은 살을 에일 듯이 불고 있었다. 이 시기에 얼음의 땅 북방으로 가, 오랑캐들을 소탕하라는 명을 받은 성현제는 어전에서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오랑캐 소탕이야 이전부터 있어왔으니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그저 내어준 병사의 수와,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을 뿐이었다. 사병은 사용하지 않되, 오백의 군사만으로 오랑캐를 소탕하라는 명은 차라리 억지에 가까웠다. 더욱이 북방에서는 요사이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이 흉흉하게 떠돌고 있었다. 정체모를 마굴이 출현하여 짐승, 아니 마수들이 날뛴다는 소문이었다. 성현제는 피식 웃으며 예황부로 향했다. 달달한 간식거리를 집어먹으며 저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가 짓게 될 표정이 기대되었다.
한나절도 되지 않아 온 수도에 소문이 퍼졌다. 건방진 예황의 콧대를 꺾어놓으려 사지로 내모는 거라는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성현제는 개의치 않고 덤덤하게 출정에 임할 준비를 했다. 세이키는 침상 옆에 차려진 다과상에서 약과를 들어올려 우물거렸다. 방에서 갑옷을 걸쳐입는 성현제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겨울의 끄트머리였으나 언제나처럼 화로가 피어올랐고, 방바닥은 발에 땀이 날 정도로 따스했다. 입 안에 남은 약과를 꿀꺽 삼키고, 폭신한 이불 위에 자리잡은 세이키가 채비를 끝낸 성현제에게 대뜸 질문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충심이 지극했어요?”
“언제는 그러지 않은 적이 있었나.”
“지고한 충신 소리 따위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당신.”
“역시 제대로 봤군.”
“...나도 데려가요.”
“왜?”
그렇게 묻는 성현제의 말에는 순수한 의문이 담겨 있었기에, 세이키는 잠시 제 짐작이 맞는지 확신에 의문을 가졌다. 알고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저같은... 외형상 열 다섯 가량의 아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이가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하는게 의아해서는 결코 아닐 터였다.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으니, 세이키는 기꺼이 연극에 동참해주기로 했다.
“데려가면 내 이름을 알려줄게요.”
“흠, 구미가 당기는 제안인걸.”
“당신이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전제 하에.”
“그거야말로 당연한 일이니, 내가 이긴 내기로군.”
“어련하시겠어.”
전장은 온통 핏빛으로 가득했다. 세이키는 소매를 들어 코를 막으며 성현제의 팔을 꼭 붙을었다. 앞에서 화염 갈기를 두른 마수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과의 전투로 생긴 피해보다 돌연 튀어나온 마수로 인해 생긴 피해가 더 극심했다. 어군과 적군 상관 없이 거대한 앞발을 휘두르고, 성인 남성의 허리를 아그작 씹어버리는 기염 끝에 마수는 성현제와 마주하고 섰다. 너덜너덜한 살점이 떨어지지 않은 이빨에 속절없이 찢겨 나간 사람이 여럿이었다. 넓은 전장에 남은 것이 성현제와 세이키 단 둘이라는 사실을 포함하여 가히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뒤에서 팔을 꽉 붙잡은 세이키의 존재를 잊지 않은 성현제는 다른 팔로 검을 꽉 쥐었다.
“괜찮은가.”
“괜찮...지 않네요. 역시.”
“그럼 빨리 저걸 처리하고 여길 벗어나야겠군.”
마수가 위협하듯 으르렁댔다. 사방에서 풍겨오는 피냄새에 정신이 조금씩 혼미해진다. 천천히 흐려지는 의식을 겨우 붙잡으려 애쓰지만 세이키는, 세성의 기린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 팔을 잡은 손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당황한 성현제가 등을 돌려 세이키의 몸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한순간의 찰나에 마수의 발톱이 성현제의 등을 갈랐다.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 광경을 목도한 세이키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몸 안에서 익숙한 기운이 일렁였다. 저를 붙잡고 함께 쓰러지는 성현제의 등 뒤로 익히 아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모든 것을 태우면서도 저만큼은 결코 태우지 않을 화염. 눈물겨운 제 동생의 영혼.... 세이키는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성현제의 팔을 꼭 그러쥐었다. 나오지 않을 말이 정신을 잃은 기린의 속에서 조금씩 타들어갔다.
성현제가 눈을 뜬 것은, 세이키가 눈을 뜬 직후였다. 그는 욱신거리는 등의 생경한 감각을 느꼈다. 이런 부상을 입은 것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무척 낯설었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간단한 감상을 남기고서 고개를 돌려 세이키를 찾았다. 흑색의 소년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먼지와 피가 낭자한 흙바닥에 누운 자신의 머리를 제 허벅지에 뉘이고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늦잠 한번 거하게 주무시네요.”
“면목이 없군요.”
조금 더 정신을 차리자 묵직한 통증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불타고 있는 마수의 시체. 곳곳에 퍼져나간 불길이 차가운 북녘 땅의 전장을 덥히고 있었다. 성현제는 기적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단 광경을 기억해냈다. 쓰러지는 세이키를 붙잡고, 세이키의 몸에서 무언가 붉고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 광경은 필히 그것이 만들어 낸 거겠지. 심증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한유진의 검은 눈에서 한차례 노란 빛이 일렁이더니 조그만 빛이 앞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노아 씨, 부탁할게요. 이 사람을 치료해 줘요.”
노란 빛으로 현현한 작은 용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 빛으로 화해 제 몸으로 들어오는 광경을 보며 성현제는 드물게도 놀란 얼굴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 모습이 웃기고, 신기해서 한유진은 눈꼬리에 눈물방울을 달고서 웃음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 성현제는 만족스러운 듯 눈을 휘며 웃었다.
“오래 살다 보니 신기한 광경을 다 보는군.”
“요마한테 치료받은 인간은 당신이 처음일거야.”
“방금 그건 요마라고 하는건가? 그럼 불을 지른 그것도 같은 범주겠군.”
“유현이는... 엄밀히 말하면 기원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요.”
“자네는 비밀이 참 많아.”
피에 젖은 옷에서 올라오는 비린내를 애써 무시하며 한유진은 말을 이었다. 그것은 한유진에게는 항복 선언이었고, 성현제에게는 달콤한 승리를 뜻하는 말이었다.
“내 이름, 이름이요. 이제는 별로 의미도 없지만... 그래도 궁금하다면 말해 줄게요.”
“자네 이름이 내게 의미가 없을 리가 있겠나.”
“...한유진.”
“그래.”
“알려줬으니까, 이제 죽지 마요. 죽으면 쫒아가서 다시 죽여버릴거야.”
“하하, 참으로 무서운 협박이야. 내가 너를 두고 어떻게 죽겠나, 유진아.”
제 이름을 듣기 위해 일부러 사지로 나왔노라 자백하는 꼴이었다. 한유진은 피비린내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내며 성현제를 안고서 그의 귓가에 이야기를 속살거렸다. 봉래에서 태어나 동생과 함께 살아갔던 어린날의 추억을 이야기했고, 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달렸던 날들의 기억을 이야기했다. 굶어죽기 직전 나타난 여괴에게 이끌려 바다를 건넜었다. 바다 너머에 자리한 십이국의 존재와 기린과 왕, 신선. 요마가 되어 제 몸속에 자리잡은 서글픈 동생의 이름. 신발을 신으면 그 순간을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 맨발로 땅을 구르고 산을 타던 그 때의 기억과, 제 동생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모든 신발을 불태웠다는 이야기. 왕을 선정할 시기가 되자 일어나는 분란과, 물밑으로 오가는 전쟁들이 지긋지긋했다. 왕은 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왕 따위는 모시지 않고 이대로 죽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으로 일으킨 명식을 타고 봉래로 다시 건너왔노라고.
저보다 백여년은 더 살아왔음을 포함하여 기나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한유진을, 성현제는 내내 부드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한유진은 이상하리만큼 당연히 그 눈빛을 받아들였다. 구름이 걷히자 색소 옅은 머리카락이 달빛에 비쳐 은빛으로 물들었다.
“유진아, 그럼 자네.... 나보다 연상인가?”
“세상에,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요?”
“도둑놈 소리는 자네가 듣게 생겼군.”
“팔자에도 없는 연하를 만나게 생겼네.”
기린의 외향은 기린으로서 성장을 마친 시점에 고정된다. 미묘하게 쓸데 없는 정보를 성현제에게 알려주고서 한유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 봐요. 그의 요마는 성현제를 치료하고 물러난지 오래였으니 움직이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한유진을 앞에 두고 서로 마주한 성현제는 가슴이 두근거림을 알아차렸다. 한유진의 기나긴 이야기 속에서 취합한 정보들을 고르고 골라 도달한 결론의 순간이 그를 맞이하고 있다. 천천히 제 앞에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리는 흑기린의 모습을 보며 성현제는 살아오며 단 한순간도 느끼지 못한 희열을 마주했다. 이조차도 어쩌면 예상했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기린이 왕을 알아보았듯, 왕도 기린을 알아보았다. 제 집의 문 앞에서 하얀 눈 밭 위, 상아색 발가락을 오므리며 서 있던 아이를 지나치지 못했던 순간부터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순간.
한유진은 성현제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서도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흥미와 재미를 본위로 살아가는 사람. 극과 극을 하루만에도 오갈 수 있는 위험하고 상냥한 사람이란 걸, 한유진은 알았다. 지긋지긋한 왕위 선정을 피해 도망친 봉래에서 저도 모르게 이끌려 성현제의 집 문 앞에 섰을 때부터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왕이 아니라는 확신이 없어서 미루었던 게 아니다. 제 손으로 나라를 망하게 할 왕을 옹립한 기린이라는 수군거림을 두려워했던 것도 아니다.
세성을 망하게 할 왕.
번영과 몰락, 종래에는 죽음까지 함께하게 될 단 한 존재. 나의 왕.
"천명을 받들어 주상을 맞습니다. 곁을 떠나지 않고 소명을 거스르지 않으며 충성을 바칠 것을 서약합니다."
허락한다고 말해요. 오직 그만이 들을수 있게 조그맣게 내려진 목소리에 성현제는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허락한다. 말이 떨어지는 순간은 아주 조용했고, 달빛만이 적막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겉으로 보아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오직 한유진과 성현제만은 변화한 모든 것을 알았다. 연결된 순간 알았다. 이 사람은, 성현제는 언젠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것이다. 백성들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주어도 결코 자신만은 내주지 않겠지. 그걸 아는 것도, 가질 수 있는것도 그의 기린인 자신 뿐이다. 타인이 깔아놓은 길 위를 얌전히 걸어줄만한 이도 아니며, 누군가에게 죽어줄 만한 사람도 아니다. 실도한다면 그것조차 의도이겠지. 아무것도 남지 않을 멸망의 대로를 걷게 될 세성의 머나먼 미래를 한유진은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한유진은 조아린 고개를 들고 성현제와 시선을 마주한다. 천천히 내려진 시선에서 기린의 생각을 읽어낸 왕이 천천히 기린을 안아 들어올려 그나마 멀쩡한 집을 골라 터벅터벅 걸어갔다. 마루에 한유진을 앉히고서, 처음 만난 날처럼 실 터럭 한올 조차 걸쳐지지 않은 맨발을 조심스레 주물러 주며 이마와 콧등, 달아오른 양 뺨, 턱과 입술에 천천히 쪼는 듯한 입맞춤을 내린다. 피비린내 속에서 혼미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한유진은 마지막 선고 같은 입맞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눈을 감고서 마음속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것은 오로지 성현제와 한유진만이 들을 수 있는 무언의 속삭임이었다.